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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한번째 계절 00

욕조 2015. 9. 15. 04:02


  한 번도 잊어본 적 없는 까닭은, 내 마음 구석에 항상 언젠가는 그 사람을 만날 것이라는 기대감이 심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열 한번째 계절

욕조

 

 

 

 

 

  그는 불현듯 사라졌고 우리는 헤어졌다. 불꽃놀이를 하다 홀로 타버려 재가 되어버린 것처럼 나는 남겨졌다. 시간이 어느정도 흐른 뒤에야 나는 그 사실을 뒤늦게 인정하기 시작했다. 뒤늦게야 연락이 멀어진 것은 그가 대학에 간 이후부터였음을 상기했다. 핸드폰을 두고 다닐 정도로 연락에 신경을 쓰지 않던 내가 집에 들어오면 바로 연락을 걸어보기도 했지만, 그는 매일같이 바빴다. 또 한 밤 중 전화가 걸려온 날에는 술에 취한 목소리가 다반사였다.

 

  이대로 영영 보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 부활동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목에서 그를 마주쳤다. 밤이슬이 내려 아주 짙고 습한 밤이었다. 더 이상 너를 못 만날 것 같아. 말소리가 굴러 떨어졌다. 그 말만을 남기고 그는 사라졌다.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은 채. 나는 미약하게 짐작해보건대 연락을 해보려고 했던 것 같다. 침대에 누워 처음 고등학교에 올라가 그 사람을 만난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뛰었던 것처럼, 그를 떠올려 보았다. 그런데 잘 그려지지가 않았다. 얼굴도 나를 부르던 목소리도 모든 게 흐릿흐릿했다. 그 이후로 나는 꿈에서도 그를 볼 수 없었다.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시간동안 불꽃놀이 같던 지난 밤 우리의 연애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살갑지도 전혀 다정하지도 않았다. 장마가 시작되고 어두운 회색으로 하늘이 뒤덮이던 날, 그는 젖은 어깨로 집 앞에 나타났다. 비를 맞아 파란 핏줄이 드러난 손등이 창백했다. 눈틈으로 들어오는 빗줄기에 눈을 깜빡거리며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선배, 아파요? 질려버린 입술색을 바라보며 나는 그렇게 물었다.

 

  비에 젖은 채로 서로의 입술을 달싹거리던 밤, 청량했던 목소리로 불러주던 그 이름을 나는 작고 야위었던 심장에 새겨 넣었다.

 

 

 

 

 

  스무 살이라는 나이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무거운 나이였다. 모든 게 자유로워질 것이라는 생각과 달리, 그 이외의 것들은 온통 무겁게 나를 짓눌렀다. 그러니까 누군가 집 밖을 나온 나를 갑자기 납치해서 모르는 사람들이 잔뜩 있는 곳에 내동댕이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상황에 익숙해지기 위해 나는 발버둥치는 중이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끝끝내 고집을 부리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적당히 둘러대는 것에 익숙해지면서. 마치 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강의가 끝난 후 어느 날, 미팅을 하러 가자고 나를 부추기던 동기에게 거짓말을 하던 그 때 왜 그 사람이 머릿속을 스쳤는지는 의문이다.

 

“카게야마.”

“…….”

“카게야마.”

“미안.”

 

  넋을 놓다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강의실이 밝았다. 너 방학하고 뭐할거야. 글쎄. 훈련하느라 바쁠 것 같은데. 나는 방학 동안 해야 할 트레이닝과 연습 스케줄, 고향에 언제 내려갈 것인지를 대조해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종강을 하고난 뒤 보름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었다. 대학에 올라와 처음 맞는 방학이었다.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나에게 친구가 며칠만 자기 대신 편의점을 봐줄 수 있겠냐면서 물어봤을 때 덥석 물었던 것이 문제였다. 처음에는 호기심이었다. 파트타임 같은 건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탓에 포스기를 오래도록 들여다 보고, 진열하는 일도, 매장 청소도 다 흥미롭게 느껴졌다.

 

  어느정도 익숙해지자 새벽에는 어떤 손님들이 오는 지 대강 알게되었다. 한적한 새벽 편의점에 오는 것은 대체로 술에 취한 아저씨나 담배를 사러 오는 사람들 뿐이었다.

 

“1900원 입니다.”

 

  처음에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깜빡이는 형광등을 보며 주인 아저씨께 말해야 하는건지 고민하고 있을 때 손님이 들어왔다. 멍하니 의자에서 일어나 바코드를 찍고 가격을 말했는데도 아무 말 없는 상대를 이상하게 여기고서 가격을 한 번 더 말했다. 그리고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그림자에 당황하며 고개를 올렸을 때 지갑을 만지면서 누군가 멈춰있었다.

 

“…….”

 

  공기가 멈춘다면 이런 느낌일까. 온 몸의 피가 빠져나간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윽고 눈이 마주치자 심장이 끝없이 밑으로 추락했다. 그는 천천히 눈을 내려 내 가슴 부근에 있는 명찰을 확인했다. 친구의 유니폼이었다. 이름 같은 게 제대로 쓰여있을리 없다. 찰나의 순간 계산대 위에는 이천원이 있었고 종과 함께 유리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카운터 밖을 빠져나가 그 사람을 붙잡았다. 심장이 빠르게 곤두박질쳤다.

 

  내가 생각한 그 사람과의 재회는 이런 게 아니었다. 밤은 온통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꺼진 가로등과 신호등, 거리는 온통 짙은 어둠에 잠겨 제대로 보이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숨도 쉬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가는 그 사람을 붙잡았다. 친구가 가게 잠시라도 비우면 안된다고 했는데. 그런 것 따위는 이제 안중에도 없었다. 나는 이상한 민트색 앞치마를 손 안에서 구기며 남자를 돌려 세웠다. 발 언저리에 있는 어둠이 자꾸만 뜨겁고 사납게 나를 할퀴었다. 그 사람을 부르는 목소리가 자꾸만 미끄러졌다. 이상한 밤이었다. 모든 게 따끔따끔하다. 내 눈동자도, 목도, 그를 돌려세운 손도.

 

“…오이카와.”

“…….”

“토오루.”

 

  그의 이름이 입술 밖으로 나오는 순간 감정들이 왈칵 쏟아졌다. 서러움이 가득 올라왔다.

 

  나는 어둠 속에서 허겁지겁 그의 얼굴을 찾아 눈에 담았다. 이마 사이로 내려오는 갈색 머리카락이 영락없는 그 사람이었다. 그리고 까마득한 눈동자도, 그를 아름답게 보이던 섬세한 속눈썹까지도. 멀어질까봐 그 사람의 손목을 잡았다. 손 안으로 잡히는 단단한 손아귀가 내가 오래도록 그리워하던 그가 맞는데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너무나 낯선 것이어서 입을 제대로 열 수 없었다.

 

  제발 한 마디만. 나를 부르던 그 목소리로 내 이름을 한 번만 불러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밤공기를 들이마시자 그 사람이 웃었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이 년만에 만난 나를 그는 모르는 사람처럼 그렇게 굴었다. 밤이 길었다.





15.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