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 E A S O N
SERIAL SHORT DIARY BOOK GUEST




  감기에 걸렸다. 일어났을 때, 침대가 천장인지 천장이 침대인지 구별이 안 될 정도로 머리가 핑글핑글 돌았다. 아침을 먹기 위해 일층으로 내려오자 엄마가 내 얼굴을 보고 놀라며 말했다. 토비오, 감기야? 감기라는 것을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끄덕거리면서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가봐요. 코가 막혀 웅웅거리는 목소리로 대답 했다. 고열과 꽉 막힌 코, 기침까지. 틀림 없는 감기 증상이었다. 


  요즘 감기랑 독감이 유행이라고 하더라. 얼른 병원 다녀와. 엄마의 말을 들으며 나는 주장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병원에 들렀다 부활을 가겠다는 말을 전했다. 그런데 감기가 옮을 수도 있으니 푹 쉬고 오라는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감기 때문에 배구도 하지 못하다니 최악이었다. 양치를 하면서 거울 속을 바라보자 동공이 풀린 상태로 숨을 색색 내쉬는 내 모습이 보였다. 나는 한숨을 쉬며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 입었다. 


“토비오. 집 앞에 새로 생긴 병원으로 다녀오렴.”

“어딘지 알 것 같아요.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지갑을 챙겨 현관에서 운동화를 신었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가 추운 바람을 맞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이대로 나가면 그대로 얼어 죽기 딱 좋은 날씨였다. 엄마, 나 목도리. 그 말을 하자 엄마가 웃으며 목도리를 꺼내면서 내게 건넸다.






  분명 여기 쯤이었다. 얼마 걷지 않아 나타난 새 건물의 2층 간판엔 스가와라 소아 의원이 적혀 있었다. 저긴가보다. 나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1층 약국을 지나쳐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가자 대기실 가득 어린 아이들과 부모가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다. 오전 시간이라서 나 같은 또래는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접수하는 쪽으로 걸어갔다. 뭔가 미묘하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친구, 무슨 일 때문에 왔어요?”


  간호사 누나의 물음은 과하게 사근사근했다. 그리고 감기라고 말하려던 찰나, 기침이 튀어나왔다. 간호사 누나는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얘기했다. 감기에 심하게 걸렸구나. 요즘 감기가 유행이에요. 이름이 뭐예요?


“카게야마…, 토비오‥입니다.”

“토비오. 여기에 주소랑 연락처, 몸무게 적어보자.”


  그 말에 고개를 내려 흐릿한 시야로 종이를 바라보았다. 이름, 주소, 연락처, 몸무게. 나는 대충 글씨를 휘갈긴 후 간호사 누나에게 내밀었지만 뭐라고 썼는지 다시 설명해야 했다. 접수가 되었다는 말을 들은 후, 나는 다시 대기실 의자로 돌아갔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내 차례가 되려면 한참이 남은 것 같았다. 그런데 대기실이 보통 병원들과는 달리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어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80이 넘는 나는 키를 잴 수 조차 없는 기린 모양의 키 자와 알록달록한 무늬의 벽지. 그리고 열이 난 채로 방방 뛰어다니는 어린 아이들까지.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감기 탓이라고 생각하고 팔짱을 끼면서 차례를 기다렸다. 


“토비오. 진료실로 들어가자.”

“네.”


  간호사 누나가 큰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들었고, 나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병원 치고는 굉장히 친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환자 이름을 이렇게 불러주나? 열 때문에 아직도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다. 그리고 내 무릎을 조금 넘는 아이가 사탕을 꼭 쥐고 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고 목도리에 고개를 푹 묻으며 일어섰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 다시 쉬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진료실 안으로 들어가며 외투를 벗고 의자에 앉았다. 맞은편에는 옅은 머리색의 젊은 의사 선생님이 진지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한눈에 보기에도 미인이었다. 남자에게 미인이라는 말이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 아래로 눈꼬리가 곱게 휘어진 모습이 다정하고 신뢰감 있게 느껴졌다. 


  체온계가 삑 소리를 냈다. 남자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환하게 웃었다. 그 모습이 청순해보여 스스로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열이 38도가 넘네요?”

“심한 건가요?”

“많이 어지러웠을텐데.”


  그냥 일어나보니 감기에 걸린 것 같아서‥. 나는 살짝 말을 흐리며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자꾸 걸렸던 게 있는데. 나는 서류에 무언갈 쓰는 그를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근데 선생님 이름이‥,”

“네?”


  하얀 가운을 단정하게 입은 남자의 명찰엔 스가와라 소아 대신 스가와라 코우시라고 적혀 있었다. 설마 소아과에 온걸까. 나는 퍽 심각한 표정으로 남자에게 사뭇 진지하게 물었다. 혹시 여기 소아과인가요? 말을 꺼내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열이 더 오르는 것 같다. 부끄러움을 어떻게든 가리고 싶어 가지런히 모으고 있던 손가락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진료실에는 한동안 적막이 흘렀다. 그리고 눈 앞의 의사는 정말이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그제서야 깨달은 듯 진료실이 크게 떠나가도록 웃었다. 


“소아과가 아니라 제 이름인 줄 알고 여기에 온 거에요?”

“…….”

“어쩐지, 웬 고딩이 왔나 했네.”

“…부끄러우니까, 더 이상 말씀 안하셔도‥.”

“괜찮아요. 소아과에서 청소년까지 진료 하니까. 그런데 운동 하나봐요?”


  남자가 흘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쩐지 그 눈길에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어 대충 고개를 끄덕거렸다. 겨울철에는 특히 조심해야 돼요. 다치기 쉬우니까. 나는 조금 머뭇거리다 스트레칭까지 잘 하고 있다는 말로 대답했다. 남자는 내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웃었다.  


“약은 이틀치만 지어줄게요.”


  또 와요. 남자의 말이 뒤이어 햇살처럼 떨어졌다. 


  왜 병원을 또 오라는거지. 낫지 말라는 건가. 나는 의사를 빤히 쳐다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남자는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나는 그가 준 빨대가 꽂힌 요구르트를 쪽쪽 빨아 마시면서 나왔다. 손 안에는 그가 쥐어준 사탕이 한 뭉치였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가며 손바닥을 폈을 때, 나는 픽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사탕 사이로 작은 종이에 적힌 숫자들이 보였다.  


  어쩐지 다시 병원에 가기 전에 남자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6. 02. 09 스가카게 합작에 참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