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 E A S O N
SERIAL SHORT DIARY BOOK GUEST


  황제의 궁을 다녀온 후, 부족한 물품들이 제대로 나오기 시작했다. 상궁들은 이제 다른 궁으로 빌리러 다니지 않아도 된다며 크게 기뻐했다. 황제의 한마디에 이렇게 달라지는구나. 어쩐지 허탈하기도 하고 자신의 무력감을 느끼게 되어 카게야마는 새삼 마음이 편치 않았다. 궁 안에서의 무료한 나날들은 계속되었고, 악을 쓸 힘조차 남지 않았다. 곧 황궁에서는 큰 연회가 열린다. 상궁이 넌지시 설명을 해주는 말에도 카게야마는 텅 비어있는 마음을 억누르지 못했다. 자신과는 상관 없는 일이었다. 


  아오바죠사이가 자신의 나라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마마. 키타가와에서 온 사신들이 마마를 뵙고자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적당히 돌려보내라.”






  키타가와는 아오바죠사이의 형제국으로 카게야마도 어린시절 그 곳에서 유학을 한 경험이 있었다. 과거 카라스노와 비슷한 크기의 국가였으나, 카라스노가 패망한 후에는 아오바죠사이에 둘러싸여 정치적 요충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변국과의 교류를 활발하게 만드는 무역중심국이 되었다. 키타가와의 학자들은 예전부터 청렴하고 결백할 뿐만 아니라 학문에 박식하여 아오바죠사이의 선대 황제들은 태자 시절 키타가와에 유학을 가기도 하며 연례로 그들을 초청하고 연회를 베풀었다.


  하늘 높이 풍악이 울리고 진수성찬이 차려진 연회장에는 각 나라에서 온 사신과 무희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중 가장 높은 단의 정중앙에 앉은 오이카와의 양 옆으로는 후궁들이 빼곡히 앉아 황제의 기분을 돋우었다. 가히 그의 여성편력을 엿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화려하고 웅장한 연회장에서 자신의 꽃을 내어 보여주며 미소를 짓는 황제는 봄기운을 만끽하며 크게 기뻐했다. 


  연회가 한창 무르익던 찰나 키타가와에서 온 사신들이 황제를 향해 걸어왔다. 여러 나라의 언어가 섞이는 기간 동안 더움 삼엄하게 경비해야 할 의무를 지닌 이와이즈미도 잠시 그들을 보며 표정을 풀었다. 


“쿠니미! 킨다이치!”

“폐하를 뵈옵니다. 홍복을 누리소서.”


  정성을 다하여 예를 올리는 쿠니미와 킨다이치를 보며 황제는 되었다는 듯 어서 일어나라는 손짓을 했다. 


“그대들이 장성하여 내 나라에서 본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다. 오늘 연회는 그대들을 위한 것이나 다름 없어.”


  평소 자신의 표정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는 황제는 그들을 보며 크게 기뻐하고 술잔을 내렸다. 쿠니미와 킨다이치는 엎드렸던 몸을 일으켜 조심스레 술잔을 받았다. 술을 마시기 전, 쿠니미는 할 말이 있는듯 입술을 달싹거리며 움직였다. 


“폐하, 새로 맞은 비 마마를…,”

“마셔라. 오늘은 기분이 좋군.”


  폐하, 저희의 말을‥. 옆에서 거들었던 킨다이치의 말 또한 흥에 겨운 오이카와의 명령에 막혀버렸다. 황제는 그들에게 계속 술잔을 들게 하고 연회가 끝난 후에도 자신의 궁으로 그들을 초대하여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다. 황궁 주변으로 빼곡히 들어앉은 등불들은 밤새 꺼지지 않고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



  황궁은 며칠간 들썩였다. 이따금씩 자신의 처소로부터 멀어지면 맑은 월금과 향비파 소리가 울려퍼졌다. 카게야마는 소란스럽게 들썩이는 곳을 바라보다 곧 고개를 돌렸다. 마음 붙일 이라고는 없는 이 곳에서 홀로 동떨어진 기분이었다. 


  재수 없는 황제.


  전쟁이 종식된 후로 피를 묻히지 않고 처음 본 황제의 얼굴이 또렷하게 가슴 속에 박혔다. 카게야마는 갑작스레 드는 황제 생각에 나가기 전 인상을 찌푸리며 공을 끌어 안았다. 잠이 들기 전마다 제 나라를 몰살한 황제에게 칼을 겨누고 찌르는 상상을 몇번이고 했다.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면 여전히 어색한 궁 안에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돌보던 상궁 몇몇이 있을 뿐이었다. 녹슬어 폐허가 된 마음을 구기고 카게야마는 봄바람을 맞으며 공을 높이 올렸다. 너무 높이 올렸나. 공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고개를 돌리자 가까이 선 버드나무 나뭇가지 위에 내려앉은 공을 보며 카게야마가 한숨을 쉬었다. 마음이 여기 없으니 몸도 제멋대로이구나. 


  카게야마는 나무를 노려보다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처소 근처에서 카게야마를 바라보던 상궁이 놀라 기함을 하듯 쫓아왔다. 


“마마님, 제발! 올라가시면 안 됩니다! 공이야 하나 더 만들면 그만이지 않습니까. 저희가 가서 내리겠습니다. 마마, 제발 옥체 보존 하시옵소서!”

“괜찮다니까? 금방 내릴 수 있어.”


  카라스노에 있었어도 경을 칠 만한 행동이었으나, 이제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해도 말릴 이는 제 걱정을 하는 상궁들 뿐이었다. 뭐하러 남에게 시켜. 이 궁에서 키가 가장 큰 사람은 자신이었다. 카게야마가 나무에 올라 손을 뻗는 모습을 초조하게 바라보는 동안, 상궁 곁으로 낯선 목소리가 떨어졌다.  


“마마께선 뭐 하는 짓이냐.” 


  쿠니미와 킨다이치는 카게야마의 모습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나이가 들어도 기이한 행동은 변하지를 않는군. 황제의 궁에서 꼬박 사흘 동안 술을 마시며 버텼다. 카라스노 왕자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면 오이카와는 듣기도 싫다는듯 술을 권했다. 황제에게 대들 수도 없고. 쿠니미와 킨다이치는 황제의 심술을 버텨내며 오늘 아침에서야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카게야마의 처소에 찾아왔다. 마지막까지 황제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쿠니미? 킨다이치‥?”


  어느새 나무에서 내려와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한 카게야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왔다. 카게야마를 오래 돌봐온 상궁만이 새하얗게 질려 그를 말렸다. 카게야마가 입은 궁의의 어깨 부근은 찢어지고 다 해져 차마 볼 수 없는 꼴이 되었다. 카게야마는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그들을 보고 반가움으로 가득차 한걸음에 달려갔다. 


“마마, 옷부터 갈아 입고 오세요.”

“어? 응….”


  쿠니미의 단호한 말에 카게야마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사라졌다. 다과상이 준비되는 동안 쿠니미와 킨다이치는 주위를 둘러보며 한숨을 쉬었다. 카게야마의 처소는 따스한 봄이 찾아왔음에도 여전히 냉기가 돌았다. 


“마마.”

“너희를 여기서 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쿠니미와 킨다이치는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황제가 카게야마를 싫어하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 대접이 박할 줄은 몰랐다. 카게야마는 자신들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이것저것 내려오라 지시를 했지만, 궁을 둘러보아도 소박하고 허름하여 카게야마가 이 곳에 와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직첩도 내리지 않아 그저 마마로 부를 수밖에 없었다. 


  설마 아오바죠사이에서 재회할 줄이야. 할 말은 많았지만 가슴이 무거워 다들 말을 잇지 못했다. 킨다이치에게 무슨 얘기라도 꺼내보라며 채근을 하기 위해 쿠니미가 고개를 돌리자 그는 이미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이럴 줄 알았다. 카게야마는 그들을 보다 아무렇지 않게 차를 마시며 입을 열었다. 


“황제 말이야.”

“네?”

“어떻게 죽일 수 있을까?”


  카게야마는 쿠니미와 킨다이치를 보며 웃었다. 찻잔을 떨어뜨리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지나가던 누군가 이 대화를 엿듣기라도 했다가는 그 자리에 있던 셋 모두 음모죄로 잡혀가 고문을 받고 그대로 처형당해도 할말이 없었다. 오싹해진 쿠니미와 킨다이치는 하옇게 질린 얼굴로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농담이다. 표정 풀어. 이 궁 안에 처박혀 황제 얼굴은 보지 못하는데 무슨 수가 있겠느냐.”

“조심 좀 하세요.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떡합니까.”


  조심성 없는 카게야마의 말에 쿠니미가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황제는 어찌나 성격이 나쁜지 아오바죠사이의 덕이 다 떨어졌다는 것 쯤은 알겠더군.”


  얼마 전 일이 생각나는지 카게야마는 조금 삐딱하게 자세를 고쳐 앉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황제의 목숨을 가지고 얘기를 한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황제의 험담이라니. 쿠니미와 킨다이치는 당혹스러워 하면서도 지난 며칠간 황제에게 시달린 것이 생각나 대충 맞장구를 쳤다.  


“그렇긴 하지요. 폐하께선 키타가와에 있으실 때에도….”

“키타가와?”


  킨다이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이야기 하는 순간, 상궁이 나타나 그들을 불렀다. 


“폐하께서 나리들을 부르셨습니다. 지금 바로 황궁으로 들라 하십니다.”

“아니, 온 지 몇 시진이나 되었다고 벌써‥.”

“이미 밖에 모시러 온 분들이 계십니다.”

“알았네.”


  폐하께선 과거 친우와 잠시 만날 온정도 베푸시지 않는다는 것인가. 어느새 카게야마에게 물들었는지 섭섭한 소리를 내뱉는 킨다이치를 보며 쿠니미가 팔꿈치로 그를 찔렀다. 그러면 그렇지. 카게야마는 제 궁에 오지 않겠다고 못을 박은 황제가 제 궁에 온 이들을 어서 데려가려 하는 태도를 보고 기가 차 헛웃음을 지었다. 천하를 다스린다는 자가 이렇게 속이 좁아서야. 


“얼마나 머물다 가?”

“삼일 뒤면 떠납니다.”

“그 동안 꼬박꼬박 내 궁에 와줄 수 있지?”

“…….”

“사람은 물론이고 쥐 새끼 한 마리가 얼씬도 하지 못하는 내 궁에 아무도 찾는 이가 없는데…나는 어찌…”

“알겠습니다. 날이 밝자마자 찾아오지요.”


  쿠니미와 킨다이치는 카게야마의 어두운 표정에 마지 못해 대답을 하고 일어 섰다. 카게야마는 그들을 돌려 보내고 괜스레 짜증이 나 눈을 부릅 뜨고 아무 서적이나 꺼내 읽기 시작했다. 자신이 궁에 도착하기 전부터 꽂혀 있던 낡은 것이었다. 카게야마는 진지하게 아오바죠사이의 언어를 해석하며 붓과 화선지를 꺼냈다. 그리고 서툴게 황제의 얼굴을 상상하며 그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상궁이 저주와 관련된 것을 알고 깜짝 놀라 그것들을 모조리 태울 때까지도 카게야마의 화는 풀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