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 E A S O N
SERIAL SHORT DIARY BOOK GUEST


  카게야마는 한동안 고개를 들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태어날 때부터 자신을 거부하는 이를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카게야마도 마찬가지였을 테지만, 전쟁이 끝난 후 이제는 역사에서 이름이 사라지고 혈혈단신으로 생포되어 온 패국의 왕자일 뿐이었다. 아무리 나를 거부한다한들, 이미 너는 새장 안에 갇힌 새일 뿐이다. 그저 작은 동물의 반항으로 여긴 오이카와는 차올랐던 화를 금세 억눌렀다. 이윽고 그는 가볍게 손을 놓으며 여유로운 어투로 말했다.   


“오찬이나 같이 들자구나. 궁으로 안내하라.”


  그 말에 황제 곁에 있던 태감과 나인들 모두 놀란 표정을 짓다 감췄다. 알다가도 모를 황제였다. 카게야마는 이해할 수 없었다. 차라리 죽여달라며 무릎을 꿇은 자신을 이 궁 안으로 데려온 것도 모자라 사람의 속을 뒤집어 놓다니. 또 한껏 여유로움이 베어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렇게 만나지 않았어도 마주치기 싫은 사람이었다. 


  후궁은 황제의 호화로운 꽃이며, 황제의 손짓 하나로 은혜를 입는다. 카게야마는 코웃음을 쳤다. 그런 것 따윈 알고 싶지도 않았다. 오이카와의 물음에는 대답할 가치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천자로 태어난 카게야마는 타는 속을 애써 달래며 오이카와의 말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궁의 이름은 무엇인가.”

“… 그것이 폐하께서 아직 내리시지 않아‥ 이름이 없사옵니다.”


  황제가 태감과 이야기를 나누며 멀어지는 동안, 남겨진 카게야마는 옴짝달싹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처음 보는 후궁이 황제와의 오찬이라. 다른 후궁들이라면 매우 기쁘고 벅찬 마음으로 황제를 모셨을 테지만 카게야마는 황제를 원하지 않았다. 죽지 못해 사는 동안 카게야마는 얼굴도 모르는 황제를 저주하고 증오했다. 


  카게야마는 황제의 뒷모습을 보며 눈을 치켜 떴다. 제 주인의 고집에 안절부절 못한 상궁들과 시종들만이 머리를 조아렸다. 마마, 이러시면 안 됩니다. 어서 폐하를 모셔야지요. 거의 애원조에 가까운 목소리가 궁안에 퍼지는 것을 들으며 황제는 보이지 않게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가장 나이가 지긋한 상궁 하나가 갑자기 튀어나와 황제의 뒤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폐하. 소인이 목숨을 걸고 말씀드리옵니다. 마마께서는 폐하를 모실 수가 없습니다.”


  무슨 말이지? 황제와 대장군 이와이즈미가 뒤를 돌아보았다. 흑단같은 머릿결을 가진 후궁은 제 상궁의 말을 듣자 그제야 험상궂은 표정을 풀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시 앳된 얼굴이었다. 상궁이 말한 것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아오바죠사이에 온 뒤로 입이 짧아졌다고 느꼈을 뿐이지, 궁녀들이 아껴 자신의 상을 차렸다는 사실을 깨닫자 미안함과 속상함에 마음이 얼룩졌다.


  아무리 패전국의 왕자에게 박하다고는 하지만 제 후궁의 대접이 이따위인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오이카와는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누가 중간에서 장난질이라도 쳤나보군.”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하나마키에게 일러 시정토록 하라.”

“예, 폐하.”

“그럼, 황궁으로 가지.”


  오이카와의 한 마디에 자리에 선 모든 이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황제는 후궁들의 처소에 발걸음만 할 뿐, 지금껏 자신의 궁에 후궁을 들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여전히 입술을 삐죽 내밀고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카게야마를 보며 오이카와가 호탕하게 웃었다. 다른 이들과는 여실히 다른 남자 아이였다.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좋지 않은 것은 또 무어란 말인가. 말을 얼버무리는 후궁을 보며 오이카와가 흥미롭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몸이 좋지 않으면 내 너를 만나지 않을 것 같으냐.  


“오지 않으면 아까 그 상궁의 목숨은 없을 것이다.”


  카게야마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오늘 처음 본 황제는 지금까지 인생에서 본 사람들 중 가장 제멋대로였다. 그것이 황제의 위치이며 황제만이 누릴 수 있는 무소불위의 특권이라고 하지만 카게야마는 황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온화한 말씨로 얘기하지만 결국은 명령과 강요인 것이 더더욱 싫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능구렁이 같은 자였다. 만난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자신을 손바닥 위에 올린 것 처럼 구는 자가 이 나라의 황제라니. 카게야마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



  황제의 궁은 들어가기 전부터 매우 호사스러웠다. 카라스노에서는 볼 수 없는 꽃들이 가득 심어져 있었다. 청명한 바람이 불고 햇빛을 받아 정원과 궁궐 모두 빛을 내는 것을 보며 카게야마가 발걸음을 멈췄고, 문지기들과 궁인 모두 고개를 숙이며 문을 열어 젖혔다. 궁 안은 영롱한 황색과 녹색으로 번들번들 빛났으며 오후의 볕은 따사롭게 궁 안을 감싸고 있었다. 사내 치고 고운 얼굴을 가진 황제를 닮은 꽃내음도 났다. 카게야마는 황제의 상이 차려져 있는 곳까지 걸음을 부러 길게 늘이며 다가갔다. 황제는 커다란 손을 들어올려 짐짓 앉으라는 표시를 했다. 카게야마는 조심스레 황제와 마주보고 앉았다. 황제는 차잎을 우린 듯한 눈동자로 카게야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나라의 하늘과도 같은 황제의 상은 화려했다. 아오바죠사이국의 예절을 알려줬던 기억이 분명 나는데 새까맣게 잊어버려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카게야마는 눈치를 보다 머뭇거리며 수저를 쥐었다. 


“패국의 법례인가 보지? 아니면 아직도 자신의 신분을 인식하지 못하는건가?”


  오이카와의 목소리를 듣고 카게야마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 자리에서 화를 내면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 하지만 황제에게 모욕을 들으니 밥이 넘어 갈리가 없었다. 황제라는 이는 할일이 없는 것인가. 목울대로 넘어가는 것이 온통 까끌하여 속이 편칠 않았다. 말없이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고 침묵은 매우 무거웠다. 오이카와는 알고 있었다. 카게야마의 눈빛은 자신에게 호의적이지도 복종하는 눈빛도 아니었다. 어떻게든 시간이 흐르기를 바라는 눈빛에 심술이 나기만 했다. 


  마지막까지 나온 다과상을 보고 카게야마는 입을 벌렸다. 카게야마가 좋아하던 과편果片도 있었지만 입에 당기지 않았다. 그저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을 뿐. 


“이렇게 많이는 못 먹습니다.”

“다 먹지 않아도 된다.”


  왜 당연한 말을 하냐는듯 오이카와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하는 짓 마다 이상한 후궁이었다.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도 그렇고, 싫어하는 것이나 좋아하는 것은 금세 얼굴에 드러났다. 마치 어린 아이처럼. 오이카와는 조심스레 다기를 쥐고 자신 앞에 놓여있는 잔에 따른 뒤, 다시 제 잔에 차를 따르는 카게야마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찻잔을 가까이 가져가자 오과차 향이 코끝에 맴돌았다. 


“너는 그나마 손가락이 예쁘구나.”

“…….”

“얼굴이 못생겼다는 뜻이다.”

“…예.”


  오이카와가 장난스럽게 말하고 카게야마는 딱딱하게 대답했다. 아무리 봐도 그저 사내 아이란 말이지. 궁 안에는 아름답고 화려한 여인들이 가득했다. 더욱이 오이카와의 취향은 이런 수수하고 단정한 얼굴이 아니었다. 오이카와가 향기를 음미하는 동안 카게야마는 차를 삼키고 인상을 찌푸렸다. 차로 적셔진 입술은 촉촉했다. 한참을 생각해보아도 이 후궁에게 끌리는 요소는 없었다.  


“이제 가도 됩니까.”


  괘씸하고 무례했다. 뻣뻣하게 다과상 앞에 앉아있는 카게야마를 보며 오이카와가 픽 웃었다. 


“내가 다시 그대를 찾을 일은 없을 것 같군.”

“바란 적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