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 E A S O N
SERIAL SHORT DIARY BOOK GUEST




  성국 아오바죠사이는 황제 오이카와 토오루가 다스리는 동쪽의 국가였다. 황제는 젊은 나이에 황위에 오르자마자 내부에 분란을 조장하는 무리들과 반란분자들을 제압했다. 그 결과 강력한 왕권을 잡은 그는 주변국을 하나씩 통일해가며 나라를 부국강병하게 만들었다. 아오바죠사이는 가장 먼저 카라스노와 전투를 벌이면서 3차 전에서 끝내 승전보를 울렸다. 오이카와 즉위 2년, 카라스노가 속국이 된 해에 백성들은 황제를 드높게 섬기고 칭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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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게야마는 자신의 소매를 붙잡고 단장을 시작하는 상궁의 눈을 피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카라스노국에서 가져온 씨앗을 심었던 메마른 정원은 겨울이 다 지나자 작고 예쁜 꽃망울들을 톡톡 터트렸다. 꽃내음이 가득한 궁과는 달리 매일 밤 잠들지 못한 카게야마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다. 덧없이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카게야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장신구가 뭐가 이리 많으냐.”

“마마….”

“어차피 우리 뿐이다.”


  카게야마가 태어날 때부터 오랫동안 보살펴 온 상궁은 시름이 가득한 목소리에 고개를 푹 떨어트렸다. 활발하진 않아도 누구보다 강인하고 단단했던 왕자님이 이렇게 된 것도 아오바죠사이로 온 후 부터였다. 부국의 황제는 카게야마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않은 채 혼례도 올리지 않고 사람이 드나들지 않은 궁에 카게야마를 가둬놓았다. 


  비단과 장신구 모두 카라스노국에서 왕족으로 있을 때보다 현저히 부족했다. 본래 의복과 식량에 관심이 없던 왕자는 모를 터였지만, 황폐한 궁으로 온 뒤부터는 카게야마가 먹는 것까지 부족하여 궁녀들은 하루에 한끼만 먹는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이제 다 되었습니다. 화려한 고급 비단은 아니었지만 단정한 의복을 걸친 카게야마를 보며 상궁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참고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자신의 의복이 마음에 들지 않은지 카게야마는 여전히 입술을 삐죽 내민 채였다. 아오바죠사이는 카라스노에 비해 과하게 화려했다. 카게야마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머리에 얹어진 장신구에 손을 올렸다. 그 모습을 상궁이 알아채고 제지하자 길게 빠진 카게야마의 눈꼬리가 다시 축 쳐졌다. 


“이제 나가봐도 돼?”

“네, 마마. 해가 다 지기 전에 들어오셔야 합니다.”

“응. 상궁은 쉬고 있어! 나 애들이랑 놀고 올게.”


  사람이 들지 않는 넓은 궁의 좋은 점이라고는 그나마 자유롭다는 것이었다. 


  처음 카게야마와 그를 모시던 상궁들이 이 궁에 도착했을 땐 모두가 경악하며 입을 벌렸다. 아오바죠사이는 카라스노보다 비옥하고 넓은 땅을 가진 번성한 나라였다. 그런데 태평한 국가에 이리도 척박진 곳이라니. 게중 나이 어린 궁녀들은 아무리 패국이라 해도 이런 대접을 받을 수는 없다며 울기도 했지만, 억지로 목숨이 붙들린 채 끌려온 카게야마는 그저 눈을 꽉 감으며 그들을 말릴 뿐이었다. 


‘이런 곳이라면 황제도 나를 찾지 않겠지.’ 


  처소 밖을 나가자 꽃내음이 한껏 코를 찔렀다. 카게야마는 해사하게 웃으며 상궁이 만들어준 공을 손안에 꼭 쥐었다. 카라스노의 왕자였던 그가 유일하게 좋아하던 놀이였다. 아오바죠사이로 온 후 더이상 공놀이를 하지 못하자 상궁이 이틀밤을 새워 카게야마를 위해 공을 만들어주었다. 


“내가 공 올릴테니까 제대로 쳐야 돼!”

“네, 마마!”






  대국의 황제는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 사람이었다. 신하들의 반대도 있었지만 오이카와는 수많은 후궁을 들이면서도 개의치 않았다. 후사가 없는 황제는 신하들이 추천하는 여인들을 후궁으로 삼는 한편 권력을 분산하는 일에 혼신을 다하였다. 젊은 황제는 매일 밤 후궁들의 처소에 들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새벽까지 공무로 지친 황제가 최근 입맛이 짧아져 가장 고생하는 것은 수라水剌를 담당하는 궁인들이었다. 


“궁 안에 이런 곳이 있었던가.”

“예, 폐하.”


  아직 오찬을 들지 않은 황제는 머리를 식힐겸 황궁 안을 거닐다 한번도 가지 못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원에는 아오바죠사이에서 볼 수 없는 꽃들이 만개하고 있었다. 황제는 꽃보다 더 수려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햇살을 받아 흐드러지는 꽃들을 감상하던 황제는 순간 술렁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순간 눈 앞이 깜깜하게 어두워지고 큰 소리가 났다. 


“폐, 폐하!”

 

  황제를 둘러싸고 태감과 호위무사들이 다가왔다. 황제는 자신의 얼굴을 맞고 떨어진 공을 떨떠름하게 쳐다보았다. 누가 황궁 안에서 공놀이를 한단 말이냐. 부드럽지만 화가 단단히 난 황제의 목소리가 그대로 미끄러졌다. 아무도 제대로 입을 열지 못하고 당황하고 있을 때, 황제는 공이 날라온 곳으로 몸을 틀었다. 그러자 궁인들과 얼어 붙어 있는 한 후궁이 꼿꼿이 서있는 것이 보였다. 짐의 얼굴에 공을 맞춘 게 저 후궁 옆에서 떨고 있는 궁인인가 보군. 


“데리고 와라.”


  황제는 손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였다. 황제의 친우이자 대장군인 이와이즈미는 혀를 찼다. 예쁘면 봐주고 예쁘지 않으면 벨 생각인가. 별로 아프지도 않으면서. 황제의 심술이 솟구치는 것이 느껴졌다. 


“황제의 얼굴에 훼손을 내다니. 즉각 목을 베어도 모자르다.”


  황제의 호령에 신하들이 즉각 고개를 수그렸다. 그리고 몸을 벌벌 떠는 궁녀 앞으로 아까 본 후궁이 앞으로 나섰다. 


“누구냐.”

“지금 누구냐고 물으셨습니까?”


  이와이즈미는 조금 불안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황제는 본래 후궁 모두에게 다정한 편에 속했다. 화가 어지간히 난 게 아닌 이상 이렇게 딱딱한 목소리도 내지 않았다. 물론 여성편력이 심각한 황제가 남자 후궁에게 박할 수야 있겠지만, 제 주군이 대놓고 표정을 짓는 것은 성인이 된 후로 거의 보지 못했다. 패국의 왕자를 후궁으로 삼은 것이 불과 몇 개월 전이었는데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도 어쩐지 이상했다. 


“아, 그 카라스노의 왕자인가.”


  그러면 그렇지. 일부러 속을 뒤틀려는 속셈이었다. 황제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이제는 후궁이 되어버린 카게야마를 비꼬았다. 후궁이 입을 다물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와이즈미는 분위기를 잠재우고 후궁을 돌려보낼 궁리를 했다. 그러자 카라스노에서 온 왕자는 눈을 부릅뜨며 황제에게 대들기 시작했다. 이와이즈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런 허름한 곳에서 지내다 보면 충분히 미칠 수 있는 법이었다. 


“공은 제가 보낸 것입니다. 이 아이는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황제의 얼굴을 맞춘 것은 작은 궁녀임이 불과한데도, 카게야마는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아이를 숨겼다. 이제 뭐든 상관이 없었다. 오이카와는 예도 갖추지 않은 채 당돌하게 말하는 후궁을 보고 가까이 다가갔다.  


  패국의 왕자답게 타고난 기품이 플러 내렸지만 얼굴은 청순하고 수수했다. 오이카와는 똑바로 자신과 눈을 마주치는 건방진 후궁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도 자꾸만 호기심이 들었다. 때리려면 꺾일 때까지 비틀어야지. 카라스노의 왕자는 전혀 예쁘지도 귀엽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그저 소년의 티를 다 벗지 못한 사내 아이일 뿐. 


  황제는 가소롭게 카게야마를 바라보다 그의 턱을 한손으로 쥐었다. 건방지구나. 정말 건방져. 나를 쏘아보는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이 위태로운데 얼음장처럼 단단히 굳어있구나. 나는 네 나라를 무너뜨린 사람이지. 나를 향해 적의라도 품고 있느냐. 오이카와는 한동안 잠잠했던 정복욕이 들끓고 있는 것을 느꼈다. 


“곱지도 않은 입술로 가시를 뱉고 있군.”


  카게야마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오이카와는 한동안 햇빛을 보지 못해 하얘진 살결을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황제가 말한 것처럼 제 입은 가시라도 토해내는지 목 안이 따끔거렸다. 


“그대는 이제 이 꽃과도 다르지 않아. 내 정원에 있는 꽃 중 하나일 뿐이야.”

“…….”


  황제는 정원에 심어진 꽃 하나를 꺾으며 카게야마를 향해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