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 E A S O N
SERIAL SHORT DIARY BOOK GUEST




  봄인가. 오이카와는 비몽사몽한 표정으로 학생증을 찍고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아까 샤워를 하면서 간신히 잠을 깼다. 셔츠 단추를 잠그면서는 몇 번을 졸았는지 모른다. 새벽까지 과제 하다 죽는 삶이라니. 미친 학교. 죽어버려. 오이카와는 손바닥으로 눈두덩이를 꾹 누르다 손을 뗐다. 서서히 과제가 쌓이는 시기였다. 오이카와는 다른 한손에 들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가방을 내려 놓았다. 


  교양 시간에 필요한 책을 대출하고 구석진 자리를 찾은 그는 소파에 앉았다. 이걸 언제 다 읽지. 오이카와는 안경을 꺼내려다 놓고 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미간을 찌푸렸다. 고개를 들자 까마득한 도서관 천장 아래로 하얀 조명이 내리쬐고 있었다.  


  잘 넘어가지 않는 페이지를 몇 장 넘기다가, 문득 문 쪽을 바라봤을 때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발견했다.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입구에 서 있는 카게야마를 향해 눈길을 보냈다. 토비오가 도서관이 어디있는지 아는 애였나. 하얀 셔츠를 입은 카게야마를 보며 오이카와가 다시 커피를 마셨다.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차가웠다. 


  오이카와는 눈을 떼지 못하고 작은 머리통을 바라보았다. 도서관 정문이 열릴 때마다 들어오는 작은 바람에 셔츠깃이 흩날리는 모습이 점멸하는 빛처럼 가까워지다 금세 멀어졌다. 새하얗게 눈이 부셨다.  






  카게야마는 도서관에 들어온 후부터 어쩐지 뒤통수가 따갑게 느껴졌다. 친절하게 도서관까지 자신을 데리고 온 선배도 선배였지만,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는 것 같은 낯선 느낌이 자신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카게야마는 개의치 않고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선배가 알려주는 대로 하는 동안 잠시 다른 생각을 했다. 그러면 어김없이 들통이 났다. 카게야마, 딴 생각 해? 아뇨, 그냥. 말을 흐리던 카게야마는 아주 문득 고개를 돌렸을 때, 참사가 일어난 것을 깨달았다. 


  오이카와 토오루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삐딱하게 소파에 앉아 못마땅한 표정으로. 겨울이 다 지나던 2월 말, 한 차례 눈보라가 몰아치던 것처럼. 그의 시선은 폭설 같았다. 


  그 순간 카게야마는 몸이 빳빳하게 굳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덜컥 심장이 내려앉은 것만 느껴졌다. 옆에서 선배가 팔뚝을 툭툭 치며 물어왔다. 무슨 일이야.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카게야마는 고개를 양 옆으로 저었다. 단정한 흑발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카게야마는 그의 시선이 내리 꽂히는 등을 꼿꼿이 폈다. 


  마르지만 너른 등이었다. 


  오이카와는 미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카게야마는 이따금씩 섬찟함을 느끼다가 고개를 돌리고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오이카와가 핸드폰을 들어 액정을 톡톡 두드리면서 입술을 움직였다. <라인 봐.> 그의 입모양을 따라 읽다가 눈을 한번 깜빡인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향해 자신의 핸드폰을 흔들고 그대로 주머니에 넣었다. 저게, 진짜. 






  과제를 도와주던 선배는 강의 시간 때문에 먼저 갔다. 자연스럽게 옆자리로 오이카와가 왔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들을 슬쩍 보다 엉망으로 흐트렸다. 


“공강인데 왜 있어요?”

“지금 내가 있어서 불만이라는 거야?”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와 단둘이 있을 때 불필요하게 헤실거리지 않았다. 조금 모난 말투도 나쁘지 않은 투정에 가까웠다. 오이카와는 턱을 괴며 말했다. 그냥. 집에 있으면 공부 안 할 것 같아서. 잠자코 그가 하는 얘기를 듣다가 허공에서 눈이 몇번 마주쳤다. 이상하게 그저 좋았다. 이유 없이. 


“더 해야 돼?”

“다 했어요.”

“그럼 나가서 얘기하자.”


  학생증을 찍고 다시 나가면서 카게야마는 기지개를 폈다. 


  단둘이 만날 시간이 늘 부족했다. 대학에 가면 자주 볼 것 같았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카게야마는 도서관에 오다가 받은 젤리를 꺼내 오이카와에게 보여주었다. 먹을래요? 오이카와는 고개를 저었다. 난 젤리가 싫어. 좋고 싫고 할 게 있나. 카게야마는 갸웃거리며 껍집을 벗기고 한 입에 넣었다. 입 안 가득 단맛에 혀가 절여졌다. 윽, 달아. 말하는 순간 과일향이 훅 끼치고, 오이카와가 눈을 크게 떴다. 카게야마가 하는 행동이 모두 느리게 포착되어 확대되었다. 




  굳이 대화거리를 찾지 않아도 이제 막 신입생이 되어 이리저리 불려 다니는 카게야마에게 할 말이 많았다. 


“어제 집은 잘 들어가셨냐.”


  술만 마시면 전화도 안 받고, 문자도 안 하고. 좋을 때다. 오이카와는 빠르게 중얼거렸다. 카게야마의 변명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신기한 게 연락을 하려고 했던 기억은 분명 나는데, 늘 자고 일어나 정신을 차려보면 핸드폰엔 부재중 전화 뿐이었다. 언젠가는 제발 술자리에 가면 들어갔다고 연락만 해달라기에 술을 마시고 전화한 적이 있었다. 전화를 받았을 때, 오이카와는 놀란 것도 아니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그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결국 그 날 데리러 가겠다는 소리까지 들었는데 만나질 못했다. 술에 취해 장소를 말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기 때문이었다. 


  서로의 말소리만 들릴 정도로 떨어진 벤치로 갔다. 앉아 있으면 잔디 너머로 호수가 보였다. 선배, 저기에 빠진 사람이 백 명이래요. 어디서 또 그런건 주워 듣고 왔어. 원래 호수 있는 학교에는 그런 전설이 한 열개씩 있어. 오이카와는 다리를 꼬고 앉아, 여자애들 몇몇이 아는 체를 하자 손을 흔들며 인사 했다.


“밥은 먹었어?”

“네. 쿠로오 선배랑.”

“내가 걔랑 밥 먹지 말라고 했는데, 너 일부러 그러는거지.”


  카게야마가 가볍게 웃었다. 선배가 밥 먹자고 하는데 어떻게 거절해요. 


“선배라고 부르지 마.”

“그럼 뭐라고 불러요.”

“쿠로오라고 불러. 그리고 내 친구니까 앞으로는 걔랑 놀지마.”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마른 어깨에 손을 얹었다. 집에 가자. 걸음을 옮기는 곳마다 햇살이 쏟아졌다. 이따금씩 풀 밟는 소리가 나고 웃음 가득한 말소리로 가득 찬 공간에서 자꾸만 그의 숨소리가 들렸다. 






  전철을 타고 갈까 하다가 오이카와의 집까지 걸어가자는 결론을 내렸다. 학교에서부터 한 역 차이지만 어차피 역에 내려도 걸어가야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둘은 이 거리를 자주 걸었다. 신호등을 기다리는 동안 봄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초록불이다.> 불이 켜지는 것처럼 다른 생각을 하다가도 곧 오이카와의 생각으로 넘어갔다. 근처 중학교 운동장에서 공을 차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카게야마는 느린 발걸음을 쫓아 걸으며 이내 보이는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시끌벅적한 소음이 가라앉으며 레고처럼 줄지은 주택가가 보였다. 군데군데 높은 담을 지은 벽에는 마른 나뭇가지 위로 꽃망울들이 피어 있었다.  


“토비오.”


  봄을 닮은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가슴이 철렁거린다. 그가 이름을 부를 때마다 늘 그랬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들고 있는 커피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얼음이 사그락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집에 가봤자 할 것도 없는데. 그런데 밖은 보는 시선이 많으니까. 기숙사에 사는 카게야마의 방에 들어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오이카와가 문을 여는 동안 카게야마는 운동화로 바닥을 툭툭 건드렸다. 처음 오이카와의 집에 갔을 때 물었던 적이 있었다. 왜 학교 근처에서 안 살아요? 시끄러우니까. 그는 의외로 조용한 곳을 좋아한다. 


“이제 슬슬 더워지는 것 같아.”


  손가락으로 앞머리를 슬쩍 올린 오이카와가 말했다. 카게야마는 그의 맨들맨들한 이마를 바라보았다. 오이카와는 눈이 아주 크고 예쁘다. 그가 조각상이었다면 눈을 만드는 데 매우 공을 들였을 것이다. 


  오이카와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성큼성큼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너무 졸려. 나 다섯시에 잤거든. 그는 침대에 앉자마자 푹 쓰러졌다. 바닥에 다리를 모아 앉은 카게야마는 그 모습을 쭉 바라보았다. 피곤해요? 엄청 많이. 


“자지 말고 뽀뽀해줘.”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벽을 바라보던 오이카와의 뒤통수에 그대로 꽂혔다. 그의 갈색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오이카와는 그대로 베개를 끌어 안으며 엎드리다 슬쩍 고개를 돌렸다. 


“뭐라는거야. 생일도 안 지난 이 새내기가.”


  그 말을 하고 오이카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배, 늙은이에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바라보다 말했다. 두살 차이 주제에 왜 스무살 차이처럼 구는거야. 카게야마는 번쩍 일어나 침대로 다가갔다. 잠 들었나? 이불을 반쯤 치워놓고 누운 오이카와를 보다 카게야마가 가만히 그의 등에 얼굴을 기댔다. 가만가만 심장 소리가 들렸다. 


“자요?”


  카게야마는 손가락을 펴서 오이카와의 셔츠 안으로 집어 넣었다. 자신과 비슷한 온도.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살결을 손가락으로 더듬거리자 그의 반듯한 어깨와 허리선이 조금씩 움직인다. 오이카와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신과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다. 카게야마는 그의 이마와 볼을 만졌다. 그러자 오이카와가 눈을 번쩍 떴다. 


“야.”


  눈이 조금 충혈돼있다. 피곤해 보여. 조금 불퉁해 보이는 오이카와의 얼굴을 멋대로 만지다 카게야마는 손가락으로 오이카와의 미간을 꾹꾹 눌렀다. 오이카와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카게야마의 행동을 그저 바라보았다. 카게야마는 빠르게 입술을 가져다댔다. 선이 예쁜 입술은 말라있었다. 그러다 조금 더 문지르면 말랑거렸다. 꽃잎 같아. 그리고 입술을 떼려는 순간, 뒤통수에 묵직한 손이 닿았다. 


  서로 부딪히는 열기가 딱 아지랑이만큼 뜨거웠다. 입술이 열리자 아까 마신 아메리카노 맛이 났다. 맞물린 입술의 감촉은 아득하고 아찔하기만 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어렴풋한 햇살이 얼굴 위로 미끄러졌다. 빛줄기를 잡으려 손을 뻗자 이내 사라졌다. 오이카와는 손가락을 쥐었다 펴는 카게야마를 보며 꽃처럼 흐드러지게 웃었다.   


“오이카와상, 근데 아카아시 선배 잘생기지 않았어요? 애인 있을까.”


  얼얼하게 아려오는 입술을 매만지다 괜히 말을 꺼내봤다. 금방이라도 그가 타박을 할 것 같았다. 반 정도는, 아니 진심이었다. 그래도 순수한 마음에 물어본 거였는데, 오이카와가 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네가 왜 궁금해 해? 죽을래?”


  소나기처럼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마음을 쓸고 간다. 그 말을 들으며 카게야마가 쿡쿡 웃었다. 졸음이 가득 묻은 오이카와의 입술이 밉지 않았다. 어쩐지 봄이 한창일지 몰랐는데도,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누가 봄을 몰고 온 걸까. 카게야마는 이불을 뒤척이다 그의 베개에 가까이 얼굴을 가져갔다. 오이카와의 냄새가 났다. 푸르고 달큰한 냄새. 그를 닮아서 숨을 크게 들이 쉬면, 그가 나를 안아주는 느낌이 날까. 


  눈꺼풀을 감은 오이카와는 안온한 표정으로 자고 있었다. 커튼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볕을 등진 카게야마가 그의 곁에 비스듬히 누웠다. 어스름하게 노을이 질 때까지 그를 꼭 안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