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 E A S O N
SERIAL SHORT DIARY BOOK GUEST


오이카와상, 기억 나요?

그렇게 말하면 아무리 똑똑한 오이카와상이라도 기억을 할 수 있을까요?

오늘 좀 까칠하시네요. 이거나 알려주시죠.

건방진 토비오.






  매일 같이 체육관에서 뛰어다니던 몸이 방에서 한 시간 이상 쑤셔 박혀 있으려니 참을 수가 없었다. 오이카와의 코 앞 삼십 센티가 떨어진 곳에서 카게야마는 지루한 표정을 지었다. 오이카와는 멍하니 책을 들여다보는 카게야마를 흘끔거리며 바라보았다. 분명 벼락치기일테지. 배구만큼 공부를 했으면 토비오가 벌써 노벨상을 탔으련만. 오이카와는 책을 보다가도 금세 졸음에 빠지는 카게야마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토비오, 정신 차려. 토비오의 전공책을 툭툭 치자 그제서야 카게야마가 눈을 떴다. 


“오이카와상, 이거‥”


  남말할 처지는 아니었지만, 토비오의 전공책은 이제야 막 50페이지를 넘어가고 있었다. 너 이래서 오늘 다 끝낼 수나 있겠어? 할 수 있을 때까진 할겁니다! 카게야마가 갑자기 방이 떠나가라 큰 소리를 냈다. 하여간 공부하는 방법에는 요령이 없다. 애인이 과 선배인데 애교라도 부리면서 족보를 달라고 하면 얼마나 좋아.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다 책을 끌어 당겼다. 


“운동심리학‥ 진짜 싫어요.”


  카게야마의 말은 진심이었다. 오이카와는 낮게 떨어지는 카게야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잔잔하게 웃었다. 왕은 사람의 마음을 모른다더니, 정말이네. 그거 칭찬 아니죠. 그렇습니다. 오이카와는 샤프 뒤로 입술을 한 번 누르고 다시금 책 위에 또박또박 글자를 썼다. 


“뭐 해, 이리 와.”

“싫어요. 만질 거잖아요.” 

“오, 토비오 웬일로 똑똑하지?”

“…….”

“아, 농담이야. 빨리 옆으로 와. 나 거꾸로 못 봐.”


  그 말에 카게야마가 쭈뼛거리며 오이카와의 옆으로 다가갔다. 눈을 마주치자 카게야마가 팔을 크게 들어 가슴 위로 엑스자를 쳤다. 아직 아무것도 안 했거든? 봐봐. 나도 오늘 시간 없어. 카게야마의 허벅지를 한 번 주무른 오이카와가 연습장 위로 책에 나온 그래프를 똑같이 그렸다. 


  토비오, 너 이 수업 들을 때 잤지? 글씨가 이게 뭐야. 하나도 못 알아보겠다. 기다려봐. 나 이거 책 안 팔았는데. 오이카와는 혼자서 한꺼번에 말을 내뱉다가 갑자기 책꽂이 쪽으로 걸어갔다. 혹시 두면 언젠가 쓰일 때가 있을까 싶어 놔둔 책이었다. 전혀 생각치도 못한 곳에 쓰이다니. 오이카와가 책을 들고 책상 쪽으로 다시 다가가자 카게야마의 동그란 뒤통수가 보였다. 


“왜 또 엎어져있어.”

“오이카와상, 기억 나요? 고등학생 때도 시험 기간때 같이 공부했는데, 그 때도 낙제 했잖아요.”

“그래요. 오이카와상이라도 바보 토비오는 어쩔 수가 없었네요.”

“좀 짜증나네요. 오이카와상.”

“하하. 왜, 잘생겼는데 공부도 잘하고 배구도 잘하다니. 좀 그렇지? 사람이 너무 완벽하면 매력이 없는데 어떡하지.”

“4번 문제 알려주세요.”






“야, 이, 멍청아.”

“…….”

“너는 5+6이 12냐?”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지‥.”

“다시 풀어봐.”


  얘는 진짜 배구 못했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오이카와는 미간을 찌푸리고 카게야마가 우물쭈물 문제를 푸는 것을 지켜보았다. 단정한 손가락이 간만에 샤프를 쥐고 엉성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몇 년을 보아도 어색했다. 


“풀, 풀었어요.”

“틀렸네. 키스 하자.”

“헉.”

“헉은 무슨 헉이야. 야, 다시 풀어.”


  카게야마가 다시 미간을 찌푸리고 문제를 풀었다. 정말 스트레스가 아닐 수가 없었다. 이런거 하지 않아도 배구를 충분히 잘 할 자신이 있었다. 고등학교 담임이 분명 대학만 가면 배구만 할 수 있다고 했는데. 다 거짓말이었다. 배구부라도 학점과 이론 수업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카게야마는 울컥한 마음을 참으며 다시 문제를 풀었다. 아, 여기서 이상하게 더했다. 다시 바르게 고쳐 쓰자 아까와는 다른 답이 나왔다. 


“오이카와상, 저 다 풀었는데.”

“맞았네. 키스 하자.”

“그런 게 어딨어요.”


  카게야마는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오이카와는 생긴 것과 다르게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는데, 사귄 후부터는 시험기간이면 시간을 내서 카게야마의 공부를 봐줬다. 그나마도 반은 스킨십에 가까운 수작질이긴 했지만. 방금 전에도 문제 푸는 틈틈이 본인 공부를 하는 모습이 드물게 멋있어 보이기도 했다. 평소엔 렌즈를 끼다가 공부 할 때만 안경을 끼는 모습도 색달랐고.


  오이카와는 고학년이었고 자신은 아직 갓 입학한 일학년이었다. 마주치는 시간, 행동반경, 패턴 모든 것이 달랐다. 상관 없다고는 하지만 바쁜 오이카와의 시간을 빼앗는 것도 싫었고, 빨리 끝내고 노는 게 더 속이 편하기도 했다. 이대로라면 새벽까지 해도 끝나지 않겠지만. 결심했다는 듯이 카게야마가 책을 덮었다.  


“오이카와상. 저 저쪽 가서 공부할까요?”

“싫습니다.”


  오이카와가 빠르게 써내리던 손을 멈추고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펜을 쥐지 않은 손으로 카게야마의 깍지를 꼈다. 가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안경을 가져가 만지작거렸다. 한 번 써볼까. 익숙한 오이카와의 안경을 쓰자 금세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아, 어지러워. 토비오, 눈 나빠진다. 오이카와의 잔소리가 떨어지고, 안경은 갑자기 얼굴을 벗어나 다시 오이카와에게로 돌아갔다. 


“심심해?”

“아뇨. 저 이제 다시 공부할건데요.”

“넌 암기력만 좋더라. 뭐 때문에 또 못 풀고 있어.”

“체육부가 왜 그래프를 그려야하지? 어이 없다.”

“이것도 틀렸네. 야, 입술 내놔봐.”

“오이카와상, 혹시 헤어지는 거 좋아해요?”


  분명 몇 년 전 같으면 입술을 삐죽였을 토비오가 벌써 이런 말도 할 줄 안다니. 오이카와는 안경을 벗으며 고개를 돌리고 인상을 팍 썼다. 아니, 지가 공부를 하면 얼마나 한다고 입술 금지령을 내려? 어이 없네. 오이카와는 불만스럽게 카게야마를 바라보며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너 뽀뽀 가지고 되게 유난 떤다.”

“뽀뽀만 안 하니까 그렇지.”

“왜 갑자기 똑똑한 척이야.”


  삐졌네, 삐졌어. 카게야마가 잔뜩 찌푸린 오이카와를 보고 웃었다. 원망의 눈초리를 보내는 오이카와를 잠깐 무시하던 카게야마가 샤프를 쥔 오이카와의 손등에 빠르게 입을 맞닿았다가 뗐다. 


“됐죠?”


  순간 오이카와가 휘둥그레 눈을 떴다. 키스로는 눈 깜짝도 안하면서 가끔씩 별 것도 아닌 일에만 반응하며 어버버거리는 오이카와는 귀여웠다. 두 살이나 많은 주제에. 그리고 카게야마는 도망치듯 벌떡 일어나서 책과 필통을 들고 방문을 나섰다. 뒤가 두려웠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오이카와가 고개를 가볍게 저으면서 웃었다. 언제 저런 짓도 할 줄 알게 된거지? 이게 다 몇 년을 거친 내 개인 지도 덕인가! 


  다 오이카와상한테 배운건데. 카게야마는 순간, 한 마디를 더 하려다 살짝 벌어진 입술을 꽉 닫으며 거실로 나갔다. 오이카와의 눈빛이 생각보다 훨씬 위험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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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함 없는 것=토비오의 성적


2016.01.30 #오이카게전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