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 E A S O N
SERIAL SHORT DIARY BOOK GUEST


  고등학교 1학년 생일 날, 겨울비가 그치지 않던 그 날. 오이카와 토오루는 결국 제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일주일 사이 쌀쌀했던 날씨는 사그라지고 기온이 올라 옷을 두껍게 입지 않아도 제법 춥지 않았다. 하지만 어제부터 카게야마가 사는 곳에는 자꾸 이상한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다. 비바람이 세게 몰아치는 것이 겨울이라기 보다는 늦여름의 태풍 같았다. 연습이 끝난 카게야마는 카라스노와 아오바죠사이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 공터에서 우산을 쓰며 누군가를 기다렸다. 


  옅은 빗방울은 시간이 지날수록 우산을 뚫을 정도로 거세졌다. 카게야마는 빗물 때문에 자꾸만 미끄러지는 우산을 손으로 꽉 쥐었다. 흐리고 궂은 날씨는 눈앞이 침침해질 정도였지만 카게야마는 흔들리지 않고 그네 앞에 꼿꼿이 섰다. 


  3년 만에 다시 만난 오이카와 토오루와의 관계를 정의하자면 그들은 각자 자신이 속한 배구팀의 주전 세터로서 서로의 라이벌이기도 했고, 1년도 되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낸 중학교 선후배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이카와에 대한 카게야마 토비오의 감정은 남들이 지레짐작하여 단정짓는 것과는 매우 달랐다. 어느새부턴가 오이카와를 볼 때마다 동경과 그리움, 열등감과 욕망 같은 낯선 감정들이 카게야마의 마음 속에 늘 휘몰아쳤다.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한 카게야마의 마음과는 달리 빗줄기는 꽤 시원한 소리를 내며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떠내려갔다. 약속시간을 넘기고 아무리 기다려도 오이카와는 보이지 않았다. 카게야마의 저지와 가방은 모두 빗물에 잠기고, 운동화의 밑창도 축축하게 다 젖어든 상태였다. 오이카와는 연락을 하지도, 받지도 않았다. 


  카게야마는 그에게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하지만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려오고 거리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도, 오이카와 토오루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 * *




  카게야마는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손을 뻗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추위에 오랫동안 서있던 그의 작은 입술에서 하얀 김이 피어 오르다 사라졌다. 현관에 우산을 펴놓고, 고개를 흔들자 머리카락에 달라붙은 빗방울들이 그가 들어온 자국을 따라 사납게 떨어졌다. 문이 닫히는 소리는 철문이 떨어지는 것처럼 크게 울렸다. 생일인데도 기다려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어두운 집안은 더 외롭게 느껴졌다. 


  학교에서 점심을 먹은 후 아무것도 먹지 않아 공복이었지만 저녁을 먹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소파에서 넋을 놓다가 방에 올라가서 쉬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카게야마의 핸드폰이 깜빡이며 울렸다. 그는 서둘러 주머니에 들어있던 핸드폰을 꺼내어 전화를 건 사람을 확인했다. 대체 뭘 기대한 걸까. 엄마, 라고 써있는 액정을 바라보며 카게야마는 한숨을 내쉬고 아무렇지 않게 전화를 받았다. 


「토비오, 미안해… 이번 생일은 꼭 챙겨주고 싶었는데, 연말까지 집을 비우게 됐어.」

“괜찮아요, 엄마.”

「저녁은 먹었어?」

“네……배구부 선배랑 먹었어요.”

「집에 반찬 많으니까 밥 잘 챙겨먹고, 먹고 싶은 거 있으면 꼭 사 먹어.」

“네. 저 피곤해서 빨리 잘게요.”

「그래, 잘 자고 생일 축하해, 토비오.」


  걱정스러움이 잔뜩 묻어난 엄마의 목소리조차 사라지자 집안엔 다시 정적이 흘러넘쳤다. 그는 서둘러 옷을 벗으며 수건을 꺼냈다. 비를 직접 맞지는 않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밖에 있던 탓에 몸이 으슬으슬 떨려 감기에 걸릴 것 같았다. 이렇게 중요한 때에 비 오는 날 기다리는 어리석은 짓을 하다니 저 답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조금 충혈된 눈으로 수중기가 뭉글게 피어난 욕실 문을 열며 들어갔다. 서둘러 뜨거운 물을 받아 놓은 욕조에 다리를 넣자 피곤했던 몸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오지 못할 일이 생겼다면 차라리 연락을 한 통이라도 줄 수는 없었던 걸까.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만나자는 약속을 잡기 위해 고민했다. 잠을 설친 건 중학교 3학년 겨울 이후 처음이었다. 카게야마는 앞으로의 일들을 떠올렸다. 전국에 가면 그를 마주칠 일이 더 드물어질 터였고, 그는 이제 몇 개월 후면 졸업이었다. 앞으로 더 이상, 자신의 인생에서 그를 영영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연락이 싫었거나 아니면 연락할 수 없거나 어쨌든지 간에 오이카와에게 카게야마는 소중한 존재가 아니었다. 카게야마의 연락이나 약속 쯤은 가볍게 여기고 지금은 물에 빠진 생쥐가 되어버린 처량한 제 신세보다 더 빨리 씻고 침대에 누워있을지도 모른다. 카게야마는 그 생각을 하며 욕조에 몸을 더 깊숙이 담갔다. 




* * *




  잠옷으로 갈아입은 후 침대에 누운 카게야마는 핸드폰의 플립을 여닫으며 메일함을 보았다. 여전히 오이카와에게는 메시지가 하나도 오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벽 쪽으로 몸을 돌리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 때였다.


  똑똑. 카게야마는 듣지 못하고 뒤척였다. 똑ㅡ똑똑. 노크를 하는 소리가 점점 더 크게 울렸다. 마치 이건 문을 두드리는 것보다 좀더 투명하고 얇은 무언가를 두드리고 흔드는 소리였다. 카게야마는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소리가 들리는 창문 쪽을 향해 바라보았다. 창문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까부터 자꾸 쏟아지던 비 때문일까. 처음부터 창문이 제대로 잠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며 카게야마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늦은 밤, 느닷없이 벌어지는 일을 직접 겪지 않고서야 누가 자신의 말을 믿을 수 있을까. 


  커튼을 젖히고 손을 뻗자 창문 밖에는 익숙한 인영이 서있었다. 카게야마는 자신도 모르게 쾅 소리가 날 정도로 창문을 세게 열었다.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얼굴은 오이카와였다. 그렇지만 자신이 아는 오이카와와는 달랐다. 어둠에 가려 잘보이지 않지만, 분명 그의 머리에는 뿔이 솟아나있었다. 그 순간부터 카게야마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오랫동안 뛴 것처럼 어지러워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어디론가 빨려들어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카게야마의 온몸을 뒤흔들었다. 


  급작스럽게 거센 바람이 카게야마의 방에 들어오자 커튼이 나부꼈다. 카게야마는 그저 고개를 내밀고 가로등 아래 우두커니 서있는 오이카와를 바라만 보았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찾아 눈을 마주치고 씩 웃었을 때, 카게야마는 꼼짝도 하지 못하는 강렬한 기운에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아주 천천히 아이에게 말을 가르치는 것처럼 입술을 움직였다. 오이카와가 있는 지상에서 말하는 소리가 2층에 있는 자신의 방까지 들릴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소리는 가까이 붙어 귓가에 속삭이는 것처럼 생생했다. 


  토ㅡ비ㅡ오. 


  꿈을 꾸는 건가. 그러자 공허한 방 안에서 부드럽지만 나른한 목소리가 자신을 불렀다. 토비오. 


“문 열어줘.”

“…….”

“대체 이 망할 집은 어떻게 들어가는거야. 입구가 어디냐고.”

“오이카와 씨?”

“꼬맹이, 다 들리면서 모르는 척 하지 말고 열어봐.”


  자신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는 방에서 중학교 선배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분명 고압적이고 자신을 낱잡아 보는 말투는 오이카와와 비슷했지만, 오이카와라고 하기엔 제가 아는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다. 중세시대 영화에나 나오는 것처럼 고전적인 어투는 무거웠지만 이내 카게야마가 바짝 긴장하면 다시 낄낄거리며 그를 놀리기에 바빴다. 카게야마는 갑자기 자신을 둘러싼 이 상황이 오싹하게만 느껴졌다. 


  카게야마는 곧 현관문을 엄청난 기세로 두드리는 소리에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갔다. 꼭 집 자체를 흔드는 것 같은 소음이었다. 잘못 들었다. 지진이 나지 않고서는 이런 소리가 날 수 없다. 하지만 흔들리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카게야마는 조심스럽지만 빠르게, 제게 속삭인 목소리를 듣기 위해 벌컥 문을 열었다. 밤이 다 되도록 한번이라도 보고 싶었던 얼굴.


  그리고 문을 열자 눈 앞엔 비를 맞고 있는 오이카와 토오루가 있었다.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던 생일 날, 오이카와는 툭툭 떨어지는 비를 맞아 어깨가 다 젖어있었다. 하지만 그는 교복이나 유니폼 저지와는 전혀 다른 이상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 순간 칠흑과도 같은 망토가 펄럭였다. 


  오이카와 씨…?

 

  아니다. 그는 오이카와가 아니다. 


  카게야마는 문을 열자 들어오는 서늘한 냉기가 제 몸까지 끼쳐오는 것 같아 부르르 떨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로 드는 위화감에 심장이 다시 쿵쿵 뛰기 시작한다. 분명 오이카와와 똑같이 생겼으나 제가 아는 오이카와보다 훨씬 키가 크고 빨간 눈동자를 빛내고 있는 남자는 흡사…… 마왕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