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 E A S O N
SERIAL SHORT DIARY BOOK GUEST




  주말에도 남자를 보고 싶었다.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카게야마는 평일 내내 자신을 학교로 데려다주는 운전사를 호출했다. 그리고 주말까지 출근을 한 남자의 얼굴에는 불만 어린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조금 성이라도 내주면 좋을련만. 아쉽게 혀끝을 톡톡 찬 카게야마는 집안의 운전기사 대기실에서 다리를 꼬고 기다리고 있는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 여름인데도 까만 수트를 입고 있었다. 시중에 흔한 옷을 걸쳤을 테지만, 부자들이 돈을 쏟아 부어 맞춤 제작한 옷처럼 잘 어울렸다. 더없이 단정한 옷매무새다. 아버지는 이런 사람을 좋아했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평화로운 주말, 아주머니가 해놓은 식사를 같이 먹자고 권유 했는데도 극구 만류하더니 이 곳에서 다소곳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니. 스물 후반이라지만 대학생처럼 보이는 오이카와에게는 귀여운 구석이 있다. 카게야마는 후식으로 나온 살구 셔벗을 들고 먹는 체를 하며 그 근처를 서성거렸다. 

 

“가요.”


  그 말에 오이카와가 일어섰다. 카게야마는 눈 앞에 보이는 협탁 위에 아무렇게나 그릇을 내려 놓고 문 쪽으로 향했다. 뒤에서 느껴지는 아득한 그림자나 그에게서 나는 특유의 풋풋한 향기가 좋았다. 처음 제 집에 들어와 자신을 모신 날, 무슨 향수를 쓰냐는 말에 당황하며 아무것도 쓰지 않는다는 오이카와의 얼굴을 기억한다. 그 때에 비하면 그는 지금은 지나치게 뻣뻣하고 재미 없는 남자가 되었다. 카게야마는 천천히 걸음을 늦추며 날카롭게 빠진 눈을 내리깔고 남자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카게야마의 저택은 대문에서부터 본채까지 멀리 떨어진 미로 같은 곳이었다. 그래서 구불구불한 집안의 정원을 지나 대문을 나설 때도 항상 차가 필요했다. 카게야마가의 유일한 아들인 그를 위해, 차는 정문에서 바로 대기하고 있었지만 어쩐지 카게야마는 그와 조금 더 가까이 붙어 걷고 싶다는 생각에 심통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성인을 앞둔 나이임에도 여전히 철이 들지도, 들 생각도 없다고 카게야마는 스스로 인정했다. 


  집 밖을 나서자마자 투명하고 따사로운 햇살이 나뭇잎 사이사이로 흩어져 내렸다. 생동감 넘치는 여름의 기운이 온몸을 덮쳐온다. 정원의 연못에는 아무것도 살고 있지 않았지만 떨어진 이파리가 물결을 따라 부드럽게 흘러갔다. 


“도련님.”


  카게야마가 차에 타는 동안 가볍게 목례를 한 뒤 운전석에 올라 탄 오이카와가 말했다. 


“어디로 모실까요.”

“일단 집밖으로 나가요.”


  오이카와가 주말에 출근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카게야마는 개의치 않고 이른 새벽부터 오이카와를 불러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말을 기다렸지만, 돌아오는 건 애매모호한 대답 뿐이었다.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는 카게야마의 얼굴에는 여전히 졸음이 묻어나 있었다. 미지근한 시선이었지만 오이카와는 보이지 않게 웃으며 엑셀을 밟았다. 


  저택을 벗어나고 카게야마는 긴 다리를 뻗어 갑자기 조수석으로 넘어갔다. 가끔 있는 일이었지만 볼 때마다 불안해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오이카와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입술을 깨물었다. 


“토비오. 위험해.”


  사실은 그가 불러주는 이름을 듣고 싶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을까. 카게야마는 나긋나긋하게 바람을 타고 불어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안전벨트. 그리고 손을 뻗기도 전에 안전벨트를 매라는 간결한 소리가 들려왔다. 잔소리처럼 들리는데도 딱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해가 갈수록 그가 하는 말에 다 반항을 하고 싶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어디로 갈까요.”


  자꾸만 헷갈리게 그는 자주 말을 놓았다 높였다 했다. 이름을 불렀다가 도련님으로 부르기도 했고, 잔뜩 자신을 걱정해주다가도 시시하고 무심하게 반응하기도 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 그의 마음까지도 착각할 것만 같았다. 


“가고 싶은 곳 없어요? 그냥 오이카와 씨 보고싶어서 부른건데.”


  소년은 솔직했다. 카게야마는 잠시 그를 향한 시선을 떼고 차창을 바라보았다. 어른어른 퍼지는 건물의 그림자 위로 창에 또 그의 얼굴이 그려진다. 


 









“도착했습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요.”


  그는 카게야마의 명령에 모멸감을 느꼈을까. 얼핏 바라본 흰 목덜미는 변함이 없었는데. 그 말에 오이카와는 출발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카게야마를 쳐다보았다. 요즘 들어 부쩍 이런 일이 많았다. 오이카와는 타고난 성격이 좋고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다. 카게야마는 그 사실을 잘 알았기에 그의 화를 더 돋구고 싶었다. 당신이 그렇게 만들었다. 바짝 조여진 자신이 느슨하게 풀어지도록.. 죽어버린 나무를 살리는 봄바람처럼 자꾸만 불어 넣었다. 정의할 수 없는 감정들을. 허공에서 의미없는 시선들이 엇갈리고, 오이카와의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뭐가 문제야.”


  오이카와는 제가 심술을 부릴 때면 주눅들지 않고 당당했다. 더 어릴 때는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처음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 아버지가 필요해서 무릎을 꿇고 집 안에 들어올 땐 언제고, 저에겐 한 번도 굽히지도 제 말을 들어주지도 않는 남자. 


“당신 내 것이잖아요.”

“…….”

“그러니까 내 마음대로 할래요.”


  한 번도 인정해주지 않는 그의 다물린 입술이 비참하게 느껴져 분했다. 


  문 열어. 카게야마는 단호하게 말했고 팔을 뻗기 전에 오이카와가 나와 문을 열어주었다. 곧 장마가 올 것이다. 습한 기온이 벌써부터 온몸을 싸고 돌았다. 더위에 상기된 뺨을 애써 어루만지며 카게야마가 자신보다 한 뼘이 더 큰 오이카와를 올려다보았다. 운전기사 주제에.. 쓸 데 없이 잘생겼다. 벌써부터 머리를 울리는 빗방울 소리가 어디선가 들리는 것 같다. 만약 비가 온다면 내일도, 내일 모레도, 그 다음 날도 비가 그칠 때까지 오이카와는 우산을 들고 자신을 기다릴테지만, 사랑한다는 고백은 받아주지 않을 것이었다. 


  제 감정을 알고 있어도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 그에게. 


  카게야마는 잠들기 전 매일 같이 생각났던 그 입술 위에 무작정 입술을 맞대었다. 오이카와의 입술은 생각보다 마르고 얇았다. 부드럽고 간혹은 무언가 덧바른듯 진득했던 여자들의 입술과는 달랐다. 굳은 입술은 어떤 짓을 해도 열리지가 않았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상박을 꽉 붙잡으며 고개를 이리저리 비틀었다. 지금까지 수줍은 척 하는 것도 다 글러 먹었다. 


“열어.”


  제 명령이면 그래도 어쨌든 개처럼 복종하며 따르는 남자였다. 숨을 몰아신 뒤 한 발짝 물러선 카게야마가 오이카와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자 오이카와가 조금 고개를 숙이며 정말로 입을 열었다. 열어달라고 말해야 아주 조금 열어주다니, 정말이지 야속한 입술이다. 그럼 사랑해달라고 조르면 그는 나를 사랑해 줄 것인가. 카게야마는 불기둥처럼 타오르는 분노에 스스로의 마음을 던졌다. 


  나를 사랑해줘요. 내 이름을 불러주고, 늘 나를 떠올리면서 진저리가 쳐질 정도로 나를 꽉 안아주세요. 그리고 미칠 것처럼 입을 맞춰줘요. 


  나무 그늘 아래로 햇빛이 흐드러지고 어지러운 세계 속 꽃잎 같은 두 입술이 맞물렸다.